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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세진이 담배를 피우는 건 알고 있었다. 처음에 보았을 땐 정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제법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됐고.

 

배우팀 테이블에서 배세진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왜 내 발이 절로 밖으로 향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가서 보니 배세진은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있다. 술에 취해 빨개진 얼굴이 보기 싫지 않다. 배세진은 술기운이 도는지 쪼그려 앉아 고개를 묻었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배세진을 처음 만난 일이 생각이 났다. 그날도 배세진은 캠퍼스 흡연 구역 구석진 자리에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왜 저러고 있지, 추운가. 초봄의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입김이 나고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데도 나는 왜 그랬는지 한참을 서 있었다. 배세진은 익숙한 솜씨로 담뱃재를 털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배세진이 지나가자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나쁘지 않은 냄새였다.

 

담배를 피우고 캠퍼스를 걷는데 배세진이 보였다. 부끄럽다는 얼굴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지나치는 내 앞에 섰다. 앞을 완전히 막아선 것은 아니었으나 걸음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저…저기! 신입생이지? 우… 우리 학교 연극동아리 진짜 역사랑 전통 깊고! 잘하니까… 생각 있으면 놀러 와!“

 

홍보 팜플렛을 손에 쥐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극 동아리였구나. 아까는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아 몰랐는데 연극 동아리 돕바를 입고 있었다. 우리 학교 연극 동아리는 연영과 학생들이 배우를 맡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저 사람도 연영과 사람이려나.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팜플렛을 받으며 인사를 건네었던가. 아마 웃어주었던 것 같기는 하다. 반응이 없는 게 영 탐탁지 않았던지 배세진이 말을 덧붙였다.

 

"꼭 동아리 안 들어도 되니까 놀러 와. 재밌을 거야.“

 

팜플렛을 펼쳐 들고 읽으면서 걸었다. 약력과 활동사진이 간단히 실려있었다. 전통과 역사가 깊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약력이 화려했다. 창작 외에도 라이센스를 따와서 공연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경영대 건물에 도착해 팜플렛을 버리려는데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팜플렛을 손에 쥐고 강의실에 들어섰다.

 

"뭐야, 세진! 연극 동아리 관심 있어?“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하고는 웃었다. 딱히 뭐 대단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수줍음을 타는 사람이 홍보까지 나서는 열정을 보이게 하는 동아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조금 궁금해졌을 뿐이다.

 

사실은 자신도 관심이 있었다던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디션을 보러 갔다. 여자친구는 배우에, 나는 홍보팀에 지원했다. 연기에는 큰 관심이 없는 데다 그 외엔 연출이고 뭐고,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여자친구가 조금 아쉬워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디션을 보러 가면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배세진은 배우 오디션에만 참여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간단한 문답이 오고 간 뒤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듣고 나자 모든 것이 시시해졌다.

 

건물을 나와 오디션을 망친 것 같다며 울상인 여자친구를 달래주다가 배세진을 마주쳤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길이었는지 손에는 라이터와 담배를 들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어, 하고 아는 척을 했다. 여자친구가 고개를 꾸벅 숙이길래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배세진은 이럴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또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저 사람은 늘 뭐가 저렇게 수줍지. 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담배를 쥔 흰 손끝이 발그레했다.

 

담배를 물고 주위를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친 배세진은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콜록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가까스로 기침을 멈춘 배세진은 술이 올라 발그레해진 얼굴로 나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문다. 이따금씩, 아니 늘 그랬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쳐다보다가는 이내 포기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린다.

 

배세진은 늘 뭐가 그렇게 포기할 게 많고 뭐가 또 그렇게 애달픈지 모르겠다. 하여간 배우라서 그런가, 본인이 피해자인 양 억울해하는 표정 하나는 일품이다.

 

결국, 여자친구도 나도 오디션에 합격했다. 웬만해서는 다 붙여주나?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가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았다. 역시 내 여자친구가 짱이지~ 하고 아양을 떨고 밥을 입에 넣어준 뒤에야 투정은 막을 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세진은 배우팀 팀장이었단다. 어쩐지 부끄러워하면서도 홍보에 나섰더라니. 임원진이니 어쩔 수 없이 나섰겠다 싶었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학교에서 유명인사시더라. 연극을 좀 즐겨본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다. 유명 상업극의 꽤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한 경력도 있고, 연극 동아리에서 올리는 극에서는 한 번도 빠짐없이 주연 자리를 꿰찼으니까. 연극에는 관심이 없어서 전혀 몰랐다.

 

홍보팀과 배우팀. 접점이 거의 없을 것 같았는데도 꽤 자주 만났다. 홍보팀 회의에 배세진이 참석할 때도 있었다. 배우팀 팀장, 임원진이라는 명분에서였다. 나도 배우팀 연습에 자주 놀러갔다. 딱히 명분은 만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가서 눌어붙어 있는 것을 배우팀 사람들도 당연스럽게 생각했다. 배세진은 내가 가는 것을 영 불편해하는 눈치였지만 다른 팀원들이 반기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굴었다.

 

갈 길을 못 찾아 어지럽게 맴돌던 배세진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시선이 맞물린다. 늘 형은, 배세진은 어디서건 나를 먼저 찾아낸다. 어처구니없게도, 나 역시 그렇다. 늘 나를 먼저 찾아낸다는 걸 알아챌 만큼. 시선을 피하지 않자 배세진은 다시 기침을 해 댄다.

 

"불 있어요?“

 

주머니에 든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배세진은 한참을 나를 쳐다보더니 담배를 입에 물고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이다. 나는 라이터를 받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된 여름이었다. 배우팀은 텐투텐 연습에 돌입했고, 나는 연습을 구경하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했다. 배세진은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역시나 이번에도 주연 자리를 꿰찬 배세진은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했고 쉴 틈이 없어 보였다. 한 장면에 겨우 등장하는 단역을 맡은 여자친구는 초반엔 그래도 재밌는 것 같다며 즐거워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연습에 빠지는 일이 잦아졌다.

 

나? 나는 연습실에서 자리를 지켰다. 구경하는 게 꽤 재미있기도 했고, 동아리원들과 노는 것도 제법 재미있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사러 가자.“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자는 배세진이 꽤 기껍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오는 길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괜히 사방에서 꽂히는 모든 시선이 따갑고 간지러웠다. 배세진은 그 가는 팔로 아이스크림 열댓 개를 양손에 나눠 들고 언덕을 올랐다. 봉투 하나를 날 달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대체 왜 날 끌고 온 건지 묻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배세진은 정말 배우였다. 시시덕거리는 동아리 부원들의 대화에는 잘 끼지도 않으면서 연기만 하면 사람이 돌변했다. 이따금 연기를 하던 배세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면 배세진은 '배우 배세진'에서 '배세진'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 간극이 꽤 짜릿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아는, 나와 그만이 아는 시선 속의 적막과 고요.

 

배세진은 걸핏하면 나를 툭 밀어 현실 세계로 돌려놓았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하다가도 시선을 돌려 아닌 척 그 상황을 피했다. 약이 올랐다.

 

여자친구가 나오지 않기 시작하면서 나는 꽤나 바빠졌다. 여자친구가 맡은 역할은 성별 구분이 없는 역할이었다. 아무도 해 줄 사람이 없기에 내가 대신해서 대사를 쳐주곤 했다. 내 여자친구라는 이유도 한몫했을 것이다. 연대책임. 케케묵은 말이지만 여전히 그런 일이 있곤 하니까. 그렇게 별수 없이 시선을 마주해야 할 때면 배세진은 부러 공허한 눈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그 꼴이 제법 웃겼다. 당신, 이런 눈으로 나를 보지 않았잖아.

 

연습 중 쉬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배세진은 굳이 구석진 곳을 찾았고 나는 다른 동아리 부원들과 함께 한데 모여 담배를 피웠다. 배세진의 시선이 따갑게 와 닿을 때면 저럴 바에는 같이 피우고 말지 하는 생각을 했다.

 

문득, 연기를 들이켜고 내뱉는 행위가 어떻게 기호식품이 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얌전히 고개를 들고 연기와 뽀얀 입김을 함께 내뱉는 배세진을 쳐다보다가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손을 뻗는다. 배세진이 고개를 돌린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킨다. 닿지 못한 손끝이 찌릿하다. 날이 추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담배가 기호식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배세진과는 어쩐지 담배를 피우거나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학교에서 가까운 원룸촌 골목인 탓에 많은 학생이 살았지만, 집이 그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다. 하필 배세진이랑. 평소에는 긴바지만 입어 보지 못했던 하얀 다리가 품이 큰 반바지 밑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눈으로 좇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 어느 날 나는 담배를 든 채 벽에 머리를 박았다. 미쳤구나, 이세진.

 

그리고 그 무렵 여자친구는 내게 변했다고 말했다. 나는 별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미 이별을 염두에 둔 사람과 이야기해봤자 서로 감정만 상할 뿐이라는 걸 안다. 하긴, 이번 연애는 좀 오래가긴 했었다. 나는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었고 여자친구는 역시 변한 게 맞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 이제는 전 여자친구라는 호칭을 써야 맞을 것 같다.

 

전 여자친구는 나와 헤어지고는 돌연 동아리에서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여름의 끝물을 달리던 무렵이었다. 연습 중에 이렇게 나가버리면 어쩌냐는 회장의 말에도 막무가내였다.

 

뭐 그런 책임감도 없는 애를 사귀었냐며 평소 친하게 굴던 동아리 부원 몇이 내게 말을 건네었다. 나는 그때도 배세진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불편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자신보다 부원들과 더 친해진 나를 향한 질투인가, 했다.

 

이제서야 나는 그 친구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배세진의 눈이, 그러니까 그 시선이 나를. 나는 어딘지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져서 급히 담배를 입에 물고 빨아들인다.

 

배세진은 다리가 아프지도 않은지 쪼그려 앉은 몸을 일으키지를 않는다. 여기요, 라이터. 나는 미동도 없는 배세진을 불러 라이터를 건넨다. 배세진은 그제야 나를 올려다보고는 라이터를 받는다. 얇은 옷이 추워 보여 입고 있던 돕바를 벗어 건네자 휘적휘적 밀어낸다. 나는 막무가내로 등 위에 돕바를 툭 걸쳐놓는다. 남의 옷을 마구잡이로 다루지는 않을 모양인지 배세진은 웅크린 몸을 더욱더 작게 웅크릴 뿐이다.

 

비가 잔뜩 내린 날이었다. 우산은 놓고 왔는지 어쨌는지 잔뜩 젖은 배세진이 오들오들 떨며 연습실로 들어왔다. 평소 배세진을 좋아한다고 소문이 난 여자애가 부산스럽게 건넨 수건으로 몸을 닦는 배세진에게 나는 말 없이 걸치고 있던 셔츠를 건네었다. 솔직히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날이 계속 더웠던 탓에 얇은 겉옷이라도 걸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평소 친하지 않긴 해도 오들오들 떠는 사람을 무시할 만큼 나는 그리 매몰찬 사람이 아니었다.

 

배세진은 그 새침한 얼굴로 나를 한 번 보더니 고마워, 하고 말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웃으며 아이, 뭘요. 하고 대답했다. 뭔가 한마디 하려는 기색이던 배세진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받은 옷의 소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우습게도 나는 그게 또 그렇게 신경쓰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신경을 곤두세운 이유가 배세진의 속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최악이다, 이세진. 나는 배세진의 머리를 털어주려 집어들었던 수건을 손 안에서 꽉 쥐었다. 배세진은 연습실 구석으로 가 우리를 등지고 젖은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그리곤 내가 건네준 셔츠를 입었다. 셔츠는 컸고, 헐렁했다.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배세진이 몸을 일으킨다. 돕바가 흘러내리는 것을 담배를 걸치지 않은 손으로 급하게 잡아챈다. 배세진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돕바를 입는다. 배세진은 커다란 돕바에 파묻힌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같은 남성인데 체격 차이는 별로 안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나는 문득,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다. 하긴, 배세진이 귀여워보인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긴 하다.

 

배세진은 음식을 먹을 때 작게 잘라서 먹는 버릇이 있었다. 손으로 들고 먹는 음식은 꼭 양손으로 들고 먹었다. 보통 남자들이 저러면 별꼴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배세진은 괜찮았다. 연습이 끝나면 물이 아니라 꼭 포*리 스웨트를 마시는 것도 까탈스러워 보이지 않고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배세진을 귀엽다고 생각한 일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라는 거다.

 

배세진이 신경 쓰이는가? 그렇다. 배세진이 짜증 나는가? …그렇다. 그럼에도 배세진이 좋은가? …그것도 그렇다. 언제부터? 왜? 어떻게? 얼마나? 생각에 생각을 반복할수록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 결국 마지막에 도달해 도출해낸 의문점이 있었다. 그럼, 나는 게이인가? 아니었다. 분명 나는 여자친구도 여럿 사귀었고, 남자를 좋아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도 남자와 사귀라고 하면 거부감부터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배세진을 좋아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어쩌면 무언가에 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같은 남자한테. 그리고 아마도 나를 좋아하고 있을 그 사람에게.

 

그 시선을 보고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말 그대로 바보 천치였다. 마주칠 때마다 감정이 가득가득 담겨 뚝뚝 떨어질 정도의 눈을 하고서는 내가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면 그건 기만 아닐까.

 

배세진은, 지금도 나를 그렇게 쳐다보고 있다. 가로등 불빛에 닿아 일렁이는 감정이 가슴에 와서 툭툭 무심하게 박힌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배세진은 내게 소리치고 있다. 아주 악을 쓰고 있다. 이러면서 모르길 바랐다고. 기가 찬다. 나는 내 생각이 우스워 작게 코웃음을 치고, 배세진은 어깨를 움츠린다.

 

배세진을 무시하기 시작한 건 반쯤은 자의가 아니었다. 연극을 올릴 때가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홍보팀이었으므로 그 일에 집중하느라 바빠졌다. 그래도 연습실에 찾아갈 시간은 있었으나 가지 않았다. 한 두 번쯤 연습실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는데, 배세진이 나를 찾아왔다.

 

"네가 연습 때마다 도맡아 하던 그… 그 역할, 할 사람이 없어.“

 

바지춤 앞에서 맞잡은 손이 꼼질꼼질 거렸다. 나는 그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평소처럼 웃었다. 난처함이 섞인 웃음이었다.

 

"형님도 아시잖아요. 저 홍보팀인 거.“

 

알기는 아는지 주춤하는 배세진을 보는 건 내세우기 위한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난처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피하는 겁니다, 일부러. 절대 내뱉지는 않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나불나불 잘도 말을 뱉어내었다.

 

"객원 배우를 모집하는 건 어때요? 구경꾼이었던 저도 대강 합을 맞출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역할이고, 아직 무대 리허설은 꽤 남았으니까.“

 

배세진도 그게 맞는 방법이라는 건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배세진은 내려 잡은 손만 꼼질 거릴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개도 숙이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나는 상체를 살짝 기울여 배세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배세진은 우습게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상대를 앞에 두고 있고 싶지 않아서 나는 배세진의 어깨를 무심하게 두어 번 툭툭 두드리고는 말했다.

 

"저보다 좋은 배우 구할 것 같은데요.“

 

배세진이 웅얼웅얼 대답했다. 뭐라고 하는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으나 대충 짐작하건대 다른 팀원들이 보고 싶어 한다는 것 같았다. 나는 종종 놀러 가겠노라 약속하고는 배세진을 돌려보냈다. 그 이후 일적으로 마주친 자리에서는 나를 그렇게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없었고, 나는 배세진이 마음을 접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이뤄질 일 없는 마음, 잡고 있어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연습실에 놀러 가지 않은지 한 달이 다 되었다. 물론 그사이 배우팀 다른 친한 부원들과는 만나 놀고 밥도 먹고 했다. 배우팀을 모두 만났는데도 배세진은 한 번도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에 목이 탔다. 우습게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정말 우습게도.

 

결국 배세진을 보게 된 것은 모든 부원이 모이는 드레스 리허설이 시작되고 난 뒤였다. 한 달 동안 배세진은 살이 많이 빠졌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배세진도 나름대로 나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을까. 아, 너무 내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 같긴 한데. 살이 빠진 배세진은 예민한 인상이 강해졌다. 아, 그리고 또 시작되었더라. 나를 쳐다보다가 포기한 기색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것. 리허설 사이사이 빈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랬다. 이따금씩은 리허설 도중에도 그랬다. 나를 쳐다보다 연출의 사인을 놓쳐버리기도 했다.

 

나는 화장실을 가는 척 자리를 수시로 옮겼다. 그래도 배세진은 나를 찾아냈다. 이건 따로 할 말이 없다. 알고 있듯이, 배세진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우리는 서로를 쉽게 찾아냈다. 특히 배세진은 객석에 있는 나를 잘도 찾아냈다. 어둡고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시선이 얽힐 때면 나는 괜히 헛기침했다.

 

"나는 길의 끝에 도달했어요. 당신과 걷던 길의 끝에 말이에요. 늘 같은 길을 걷자 약속했던 당신은 이제 없지만 나는 이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 보고자 해요. 내가 당신을 뒤로하고 걷는다 해도 부디 나를 탓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랑해요, 당신.“

 

'사랑해요, 당신.' 배세진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배세진의 표정이며 시선 처리는 꼭 내가 그 대상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잠깐 동안 배세진과 세기의 사랑이라도 한 듯 가슴이 아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을 문질렀다.

 

배세진은 나와 내 손에 들린 담배를 번갈아 본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담배를 힐끗 본다. 배세진은 거의 다 타버린 담뱃재를 익숙하게 털어내고는 꽁초를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는다. 그리고는 새 담배를 꺼내어 문다.

 

나였어야 할, 아니 실은 온전한 내 것도 아니었던 배세진의 상대역이 무대에 올랐다. 어리고, 예쁜, 여자. 대사도 두 마디 뿐인 데다 정말 등장하는 시간은 채 3분도 안 되었으므로 연습이 거의 다 진행된 마당에 객원 배우를 써도 무리가 없었다. 내 선택은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질투가 났다. 정말이지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인데도. 연극이 무리 없이 잘 올라가는 것을 기뻐해야 할 텐데도.

 

절절한 눈으로 상대역을 바라보는 배세진을 보면서 나와 했던 연습이 떠올랐다. 나에게는 저런 눈으로 쳐다봐주지 않았잖아. 평상시 쳐다보는 감정의 절반만 담아도 저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조금 얄미워졌다. 나는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기만 바빴던 배세진을 떠올렸다.

 

배세진이 문 담배 끝이 빨갛게 타오른다. 나는 어지러이 돌던 상념을 잠시 멈추고 배세진의 얼굴에 시선을 둔다.

 

"잘하시던데요.“

 

배세진은 움찔하더니 허둥지둥 나를 본다. 그리고는 고마워, 하고 말한다. 그리고는 조용히 담배를 마저 피운다.

 

드레스 리허설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옷에 조명이 반사되는 것을 보며 조명 위치를 손보기도 했고, 조명을 바꾸면 메이크업을 수정해서 올려보기도 했다. 옷을 바꿔입는 시간도 정확히 재었다. 나는 그 과정이 꽤나 재밌다고 생각했다. 딱히 큰 관심이 있어 들어온 동아리는 아니었으나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싫지만은 않았다고, 아니 실은 좋았다고 하겠다.

 

첫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배세진은 커튼콜 때 뭐가 그리 감동적인지 펑펑 울었다. 그리고 무대 아래에서는 함께 눈물을 흘리는 몇몇 사람이 더 있었다. 나는 문득, 배세진이 빛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실패다.

 

더러운 벽에 몸을 기대는 배세진은 조금은 지쳐 보인다. 빛나던 그 사람은 이제 힘없이 등을 벽에 기댄 채 담배만 피워댄다. 배세진이 눈을 내리깐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예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형은 속눈썹도 기네요.“

 

손끝이 배세진의 속눈썹에 닿는다. 둘 다 몸이 굳는다. 미쳤어, 이세진. 당황했는지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기침하는 배세진의 등을 두드려줄 생각도 못 하고 나는 내 생각에 골몰한다. 그리고 나는 술기운을 빌려 입을 연다. 이 사람도 나를 좋아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저는 형이 좋은 것 같아요.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싫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배세진은 콜록대면서도 담배를 입에 문다. 그리고 내 쪽으론 한 톨의 시선도 주지 않는다.

 

동아리 부원들과 아직 많이 친해지기 전, 게임을 한 적이 있다. 패자는 제비를 뽑아서 거기 쓰인 벌칙을 수행하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었다. 우리 고매하신 배세진 님께서는 당연히 참여하지 않으셨다. 몇 판이나 돌았을까. 이제 숙소 바닥에는 술이 얼큰하게 취한 사람이 태반이었다. 남은 사람끼리 게임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걸렸다. 그리고 내가 뽑은 제비는, '승자가 지목한 사람에게 가서 사랑한다는 말 하고 긍정적인 답 받아오기'였다. 모두가 당연하게 배세진을 지목했고 나는 오기로 그의 앞에 서서 사랑하노라고 고백했다. 우리의 배우님께서는 내 거짓 고백에 놀란 토끼 눈을 하더니 시, 싫어. 하고 말했다. 내가 그때 뭐라고 반응했었나. 실실 웃으면서 에이, 사랑한다니까요? 받아주세요. 하고 말했던 것 같다.

 

배세진이 어떻게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버럭 화를 냈던 것 같기는 하다. 어떤 사람은 웃는 낯에 화를 내기도 하더라. 나는 실실 웃으며 저 차인 거예요? 하고 물었고 배세진은 화내기도 싫다는 듯 맞으니까 꺼지라고 했다.

 

나는 싫다는 답이 나오기 전 먼저 입을 연다.

 

"형이 저 싫어하는 거 알아요.“

 

배세진은 알면서 그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리고 저 표정은 연기라는 걸, 나는 안다. 배세진은 내 말을 듣고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묵묵히 담배만 피운다.

 

배세진은 삼 일의 공연 내내 무대 위에서 펑펑 울었다. 마지막 날에는 너무 울어서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두 눈이 퉁퉁 부은 배세진의 화장을 지우는 메이크업 팀에게 살며시 아이스팩을 가져다주었다. 쪽지에 연출이 전해달라더라는 말을 덧붙여서. 나중에 가보니 얌전히 눈 위에 아이스팩을 올리고 있더라. 솔직히 그건 조금 귀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화도 났다. 내가 주었다고 했으면 아마 저렇게 올리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배세진은 담배를 입에 물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다시 한번 입을 연다.

 

"저 형 좋아해요.“

 

배세진이 담배를 바닥에 홱 집어 던진다.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너 게이야?“

 

이번에는 말도 더듬지 않고 묻는다. 나는 잠시 생각한다. 배세진 외의 남자는 좋아해 본 적도, 좋아할 자신도 없다. 그러면 나는 게이일까, 아닐까? 내 망설임에 배세진이 하, 하고 웃는다.

 

"게임도 서로 재밌어야 게임이야. 작작 해.“

 

그러고는 그대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무언가를 빼앗긴 아이처럼 멍하니 서서 중얼거린다.

 

"…진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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