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is is love letter.
Dibi-dibi-dip
0.
"그러니까 형님 말은... 저를 납치하고 싶으시다는 거네요?"
일부러 자극적이게 골라낸 단어에도 세진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세진만 적막을 버티지 못하고 머쓱해 했다. 형님 대답 좀요. 대답을 보채자 세진의 발이 둥둥 떠올랐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행태에 세진은 세진의 손목을 붙잡아 땅에 발이 닿을 때까지 끌어내렸다.
이 위에 형광등이에요. 세진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1.
세진은 점심을 먹기 위해 동기 형 주혁의 차를 타고 자주 가던 식당으로 향했다. 학교 근처에 뭐가 없으니까 괜찮은 밥을 먹기 위해서 차까지 타야 하는 신세가 이제는 그리 별스럽지도 않았다. 이번 학기 서교수님의 과제를 어떻게 풀어야 괜찮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이번에 취업한 그 선배가 어떤 스펙으로 대기업에 입사했는지. 어쩌면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는 정보들을 세진은 본인의 입을 쉼 없이 털어 긁어모았다. 대학교 3학년 이세진은 그렇게 주워 모으는 정보들로 벌써 남들보다 빼곡하게 자소서란을 채우며 앞에선 적당히 모르는 척을 했다. 자기보다 나은 사정처럼 보이면 사람들이 잘 입을 열지 않으려는 것도 있었고 세진이 자기가 모르는 정보가 있는 걸 불안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새삼스럽고 그리 비관할 일은 아니지만, 세진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낮은 대학에 들어온 게 조금 신경이 쓰였다. 재수할까 싶었지만 본인이 깜냥이 안 돼서 죽어가는 형을 보니 날고 기는 애들 사이에서 어중이떠중이가 되는 것보다는 적당한 곳에서 최고가 되는 게 더 나아보였다. 그게 세진의 성향에도 맞았고. 높은 학점과 많은 스펙이 취업에도 유용할 것이라는 게 세진의 생각이었다. 학벌이 문제인가, 세진에게는 취업을 잘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세진과 주혁은 점심 시간이 지나 한산한 자리에 앉았다. 여기 오랜만이네요. 방학 동안 안 왔어? 집 안 갔다며. 아이, 대신 저 방학 동안 알바하느라 바빴죠 형님. 사실 토익 점수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토익학원에서 알바하며 다시 준비하느라 바빴다는 건 비밀이었다. 저번에 말한 학원 보조? 네 맞아요. 너도 진짜 열심히 산다... 하하 그런가요. 근데 혹시 거기에 알바 자리 있냐,
"물이랑 밑반찬 드릴게요. 식기는 안에서 꺼내시면 됩니다."
주혁의 말이 불쑥 들어온 커다란 쟁반에 가로막혔다. 주혁이 깜짝 놀랐다는 티를 냈다. 알바생이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던 세진은 대충 웃어 보일 뿐이었다. 물통, 컵, 반찬들을 기계처럼 내려놓은 알바생은 자기 할 일이 끝나자 재빠르게 쟁반을 들고 사라졌다. 돌아가는 얼굴이 드물게 깔끔해서 쳐다보니까 주혁이 시답지 않은 말을 건넨다.
"왜. 관심 있냐?"
"...있겠어요?"
"아 뭐야."
금세 식는 꼴이 웃기지만 세진은 웃지 않았다. 주혁은 누굴 오래 쳐다보기만 해도 관심 있냐는 장난을 쳤다. 장난이라는 걸 알지만 성별을 가리는 것도 아니라서 아닌 척 누굴 관찰하는 일이 많은 세진이 곤란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세진은 한창 씨씨를 했을 때 이 형이 하도 입을 나불거려서 어이없이 깨졌던 것만 생각하면 세진은 아직도 조금 짜증이 났다. 그렇게 마음을 주고 사귄 것도 아닌데 온갖 오해를 받고 헤어져서 헤어진 이후에 그걸 해명하느라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이 형이 넉살이 좋아 교수님께 예쁨 받는 학생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밥 먹을 일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만 했다.
"너 왜, 윤지 닮은 애 좋아하잖아."
쾅. 불쑥 양념 된 닭이 세진과 주혁의 앞에 나타났다. 세진도 실없이 낄낄대던 주혁도 소리 없이 나타난 알바생에 놀라 대화를 멈췄다. 소리가 좀 크지 않나? 힐끔 올려다 본 알바생의 표정이 무뚝뚝했다. 왠지 조금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문하신 닭갈비 2인분 나왔습니다."
세진과 주혁이 열렬한 눈빛을 보내도 사장님으로부터 입력된 멘트가 그것뿐인지 알바생은 그 말을 하곤 딱 입을 다물어버린다. 쟁반에서 책상으로 음식을 옮기는 동안 계속 꾹. 그저 존재감만 넘쳤다. 데워진 불판 위에 닭을 올리는 알바생도 손님도 아무 말이 없어 닭갈비가 익는 소리만 식당을 가득 채웠다.
"오 세진이 왔냐."
식당 문을 열고 등장한 사장님이 구세주처럼 보일 정도였다. 세진과 똑같이 고개를 돌린 알바생이 사장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사장은 알바생의 등을 몇 번 두드리곤 세진과 주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이구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목소리가 크고 나이가 있는 게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세진은 재빨리 서글서글 웃으며 그동안 너무 오고 싶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야 세진아, 너 다시 오면 내가 다른 애들보다 시급 더 쳐서 줄게. 아 정말요? 아 이거 어떡하냐~. 에이 사장님 세진이 바빠요! 그럼 너는! 저요? 제가 세진이만큼 잘 할 수 있을까요? 형님 당연히 저보다 잘하시죠! 아유 다 됐어 안 한다고 해라 그냥! 사장님이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자 주혁과 세진이 타이밍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사장은 고기를 불판에 옮기던 알바생의 어깨를 치며 소개했다.
"아, 맞다 세진아, 여기는 예전 알바생. 세진아 너 선배야 잘 구워야 돼."
"...넵."
"아 이름이 세진이세요?"
고개를 푹 숙이고 닭을 뒤적이던 알바생이 세진을 힐끔 보더니 조그맣게 대답을 했다. 넵. 아 그렇구나, 성은요? ...배예요... 아 배세진 씨~. 참고로 여기 세진이가 형이다. 또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아 세진 형님이시구나... 세진의 노력만 공중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어느새 홀연히 사라진 사장님의 목소리 대신 주혁의 스마트폰이 정적을 비집고 들어왔다.
"헉. 야 세진아 나 교수님이 찾는다. 아씨 밥 먹는데 꼭!"
"엑, 고기 아까워서 어떡해요."
"그러니까 야 세진아 너 혼자 올 수 있겠냐?"
"어차피 저 오늘 수업 없어요. 빨리 가보세요."
지갑과 차키를 챙기며 덜 익은 고기를 허겁지겁 주워 먹은 주혁이 세진을 보며 미안한 체를 했다. 투명한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주혁의 차에 주혁이 타는 것도 금방이었다. 세진은 차에 타며 뒤돌아보는 주혁에 대충 손을 흔들었다. 차가 떠나자 하늘이 세진을 놀리는 것처럼 세진이 밖을 보던 유리창 위로 비가 내렸다.
"우산 빌려줄까요."
세진이 놀라 알바생을 돌아봤다.
"......네? 저요?"
불판만 노려보던 알바생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아 그럼 감사하죠! 싹싹하게 대답한 세진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세진이 고개를 살짝 틀어 세진을 올려다보니 알바생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안 보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이거 다 굽고 드릴게요."
아 넵. 빗소리인지 고기 굽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났다.
2.
이세진은 평범하게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학기마다 등록금을 내고 부모님의 도움으로 학교 근처에 월세를 얻어 자전거로 통학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형편을 생각하면 기숙사가 낫지 않냐고들 하지만 기숙사는 남자 4명이 부대끼는 통에 생각보다 비위가 약한 이세진이 도망쳐 나왔다. 그래서 어렵게 얻은 자취방이 학교에서 20분. 자전거로 20분이다. 교통이 그렇게 좋은 동네도 아니었고 돈을 어떻게든 아끼고 싶었던 세진은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물론 과 회식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먹자골목에서 진탕 술을 퍼먹은 이후에도 내일을 위해 자전거를 챙기러 온 세진은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지 않고 옆구리에 끼고 끌고 갔다. 원래 술 마시고 자전거를 타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예전에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도전했다가 그대로 도랑으로 빠진 전적이 있었던 세진은 천천히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끌었다.
강 옆에 도로가 뚫린 세진의 하굣길은 새벽 두 시가 넘어가면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주민보다 여행객이 더 많은 동네였기 때문에 어두컴컴한 길에 자전거 체인이 감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세진은 멍한 정신을 겨우겨우 붙들며 걷다 멀리 보이는 가로등 밑에 어떤 그림자를 눈치챘다. 둥글게 말린 등과 아래로 처박힌 고개에 취객인가 싶어 신고해서 집으로 보내드려야 하나 그냥 지나쳐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인영이 먼저 움직였다. 얼굴을 보자마자 세진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 정도로 숙일 건 없었는데, 하는 생각도 고개를 들고 깜짝 놀라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겨우 떠올렸다.
세진은 걸음을 늦추며 배세진의 옆에 멈춰 섰다. 눈을 굴리던 배세진이 뒤늦게 인사를 했다. 닭갈비 집에서 보고 처음 보는 거라 둘 사이에 애매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함을 느낀 건 배세진 쪽이 더 컸다. 뭐 하고 있었냐고 물어볼까. 세진이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질문을 뱉으려 입을 여는 사이 쭈그려 앉은 배세진의 품에서 작은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고양이?
"얘가 돌아다니길래..."
고양이는 보통 돌아다니죠. 그렇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배세진에 세진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배세진이 이상한 눈빛을 보냈지만 세진은 개의치 않았다. 제 발밑에서 저에게 관심을 갖는 고양이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고양이와 눈싸움을 하던 세진이 눈을 길게 깜빡였다. 세진을 보던 고양이도 똑같이 눈을 깜빡였다.
히. 이상한 소리를 내며 털썩 주저앉은 세진에 자전거가 길가 쪽으로 쓰러졌다. 소리에 고양이가 바짝 털을 세웠고 놀란 배세진이 공중에 떴다. 세진은 떠나가는 고양이를 아쉬운 눈길로 쫓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잘못 봤나? 세진이 고개를 돌리니 눈썹을 팔자로 한 배세진이 있었다. 야 너... 괜찮아? 걱정을 한가득 담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던 세진은 배세진이 지난번 빌려준 검은색 우산을 떠올렸다.
"형님 집이 근처세요?"
세진은 배세진을 처음 만난 날 배세진을 보내고 제 앞자리를 차지한 사장님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알바생 괜찮아요? 쟁반을 큰소리로 내려놓는 걸 생각하고 한 말이었지만 사장님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특이해 여기 학교 다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야,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어. 보아하니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것 같고. 완전 TMI인데? 그런데도 세진은 사장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늘어지는 말들의 요지는 잘해주라는 얘기였다.
배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집에 가실래요? 앞뒤가 다른 말에 배세진의 고개가 멈췄다. 세진은 술 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대화를 되짚어보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혹시 제가 우산 얘기를 안 했나요? 우산?
연극의 연출자라도 된 것처럼 세진이 왜 저번에 비, 하는 말을 꺼내는 순간 투두둑 비가 내렸다. 특수효과로 비를 틀어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세진은 배세진이 비 때문에 머리를 가리는 걸 보면서도 멍하니 비를 맞았다.
"와, 비 얘기하니까 비가 오네요."
"...너,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형님도 우산 없으시니까 우리 집에서 갖고 가세요. 제안도 아니고 통보에 가까운 발언에 배세진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긍정의 대답을 했다. 졸린 지 눈을 비벼대는 세진이 걱정되는 건지 어떤 건지 몰라도 세진 대신 쓰러진 자전거를 주워주는 배세진이었다. 제가 가져갈게요. 아니야, 나 자전거 좋아해...
"? 그래요."
3.
눈에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어쩐지 머리가 아팠고 속이 울렁거리고 몸에 힘도 없었다. 분명 빌라 현관으로 들어왔고 내일 집주인 어머님이 속상해하실 걸 알지만 자전거를 내팽개쳐 놨고 계단을 올라가다 집주인 강아지를 보고 인사했고 자취방 현관에서 번호키를 누르고 문을 열었었는데... 나 설마 들어오자마자 필름이 끊겼나?
그럼 내가 데려온 배세진 형님은?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질적이고 답답한 느낌이 들어 손을 내려다보니 두 손이 케이블 타이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발목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폈다. 침대 옆에 통장을 넣어두는 서랍과 지갑이 든 가방이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보려는데 침대와 가장 먼 현관 쪽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거는 항체고 이거는 비상식량이고... 너 이거 잃어버리면 안 돼, 진짜 버리면 안 돼. 알겠지?"
고개를 쭉 빼니 어제 본 것과 똑같은 옷을 입은 배세진과 집주인의 강아지가 보였다. 이거 어제도 본 것 같은데? 배세진은 강아지를 제 앞에 앉혀두고 혼자 주절주절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저 형님도 나랑 똑같이 술에 취했나 싶었다. 강아지 앞에 뭔가를 하나씩 들이밀며 설명하고 타이르는 게 그렇게 이성적으로 보이진 않으니까. 당장이라도 배세진 형님을 불러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물으려던 것도 멈췄다. 어쩌면 이 꼴을 만든 장본인이 저 형님이라면? 섣불리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정황상 저 형님이 확실했다.
"알겠어요. 안 잃어버릴 게. 고마워요."
배세진보다 조금 낮고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또 있나? 아무리 눈알을 굴려봐도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원룸이라 숨어 있을 곳도 없는데 대체 어디서 이렇게 또렷한 말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이거는 네 부모님이 챙겨주신 거고 이거는 우리 엄마가... 근데 이거 둘 데는 있어?"
"축소 캡슐 쓰면 돼요. 저 강아지 볼에 넣어주세요."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술이 덜 깬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저 강아지, 집주인의 아들이 애지중지 키우는 노랑이의 입에서 나오는 게 맞았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가 인식한 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맞는 건지 보고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이 미친 게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근데 쟤 깨기 전에 빨리 마취해야 하지 않아요?"
노랑이가 말하는 쟤가 내가 맞다면 마취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인신매매, 납치, 생체실험 등의 살벌한 단어들이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억울함이 치고 올라왔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근데 쟤가 음주한 상태라 몸이 괜찮을지 모르..."
묶인 손목을 풀기 위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놀란 배세진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팔꿈치를 바깥쪽으로 펼쳐 손목을 배 쪽으로 내리쳤다. 손목에 묶여 있던 케이블 타이를 끊어내고 고개를 들자 경악한 배세진의 얼굴이 보였다. 발목에 있던 타이는 길이가 모자랐는지 두 개를 연결해 놓았던 것뿐이라 끊기 쉬웠다. 굳어 있는 배세진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가자 노랑이가 달려들었다. 컹컹 짖어대는 노랑이에게 한입 크게 팔이 물렸지만 한 손에 잡히는 소형견이라 떼어내기 쉬웠다. 노랑이를 침대 위로 떨어트리고 배세진의 팔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배세진이 몸을 피하며 전기충격기쯤으로 보이는 기계로 자기를 방어했다. 손에 쥔 기계에서 타다닥 전기가 튀는 게 보였다. 저걸로 나를 기절시켰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가 바득 갈렸다. 내가 우산 빌려줬다가 이런 꼴까지 당해야 하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어릴 적 배웠던 호신술의 종류를 무작정 떠올렸다. 엎어 치려는 계획은 배세진이 저걸 들고 있는 이상 불가능했다. 배세진이 내가 널 위협하려던 건 아니라며 변명 같은 걸 주절거렸지만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다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주저앉자 뒤에서 아래!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둔할 줄 알았더니 제 다리를 피해 폴짝 뛰는 배세진에 약이 올랐다. 반쯤 돌아간 몸을 멈춰 세우고 주먹을 감싸 팔꿈치로 배세진의 명치를 조준하기 위해 다시 앞을 보니 좁은 현관이 보였다. 어디 갔지?
"말로, 말로 하자! 이세진!"
소리가 나는 쪽은 천장이었다. 천장에 찰싹 달라붙은 배세진이 보였다. 놀라 입이 벌어지는 것도 몰랐다. 천장에 둥둥 떠다니는 배세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내가 다 설명하겠다고 외치며 파들파들 떠는 꼴이 내 집이지만 내가 납치 당했던 건지 제가 배세진을 납치해다가 협박하고 있었던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아 비틀거리다 우연히 배세진이 들고 있던 전기충격기가 발에 채였다. 이게 최후의 무기 같은 거겠지. 배세진을 경계하며 주워들자 간절하고 불쌍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요 몰래 빼가기는 글렀네요."
어우 턱 아파. 놀라 뒤를 돌자 처음 보는 머리가 노란 남자가 보였다. 언제 들어온 거지? 당황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전기충격기를 들고 위에 둥둥 떠 있는 배세진과 뒤의 남자를 번갈아 경계했다. 남자는 저를 보다 한숨을 푹 쉬더니 알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치지직 거리던 전기충격기의 전기의 빛이 사라지고 기계의 차가운 느낌만 손에 남았다. 다급하게 기계에 붙은 버튼을 눌러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진이 형. 저랑 형 둘 다 몸을 묶죠. 이렇게 된 이상 이거밖에 없을 것 같아요."
4.
배세진은 분명 기회라고 생각했다.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는 이세진이 갑자기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을 때 어쩌면 이건 우주가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세진의 자전거 핸들을 쥔 손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이세진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서 마음을 졸였다. 얘가, 이 문을 열면 망설이지 말고...
5.
사뿐히 바닥에 발을 디딘 배세진이 순순히 손을 내밀며 케이블 타이로 두 손목을 묶을 때도 이세진은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금발 머리의 남자가 몸이 줄어들어서 노랑이가 됐을 때 이세진은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하네스를 감아서 문고리에 매달라고 말했을 때는 손까지 떠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제 앞에 얌전히 앉은 노랑이와 배세진이 하는 말들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짓말 같아서 이세진은 그냥 기절해 있던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여기로부터 8억만 킬로 떨어진 'termhas' 행성에서 왔으며 우리 행성은 최근 멸망의 징조를 보였다. 정착하는 'arbe' 라는 행성을 찾기는 했는데 이 행성은 우리 행성인들 보다 지구라는 행성의 사람들이 살기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리 행성인들은 지구인들을 각자 조사하기로 했고 이 행성은 지구와 멀지 않아 후에 지구인들의 과학이 더 발전한다면 이곳에 이주 의향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 행성은 우리도 토착민이 아니기 때문에 지구인의 이주한다 하더라도 우주법 875조 3항으로 이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지구인의 생체 특성과 문화를 조사하여 우리 행성인들의 이주와 지구인들과의 융합을 위해 힘쓰기로 했다. 그래서 지구인을 조사하기 위해 지구로 파견되었고 나는 네 샘플만 잠깐 채취하려고 했다... 이세진은 다급하게 배세진의 말을 멈췄다.
"왜 하필 저예요?"
왜 하필 제 샘플을 채취하시려는 건데요. 이세진의 억울함이 알 수 없는 이야기들로 아연해지는 정신을 비집고 나왔다. 저들의 사정은 고사하고 왜 자신이어야 했는지 그게 궁금할 차례였다. 배세진은 조심스레 이유를 말했다. 너는, 내가 예전부터 조사해온 샘플이니까. 타당하지 않았다. 이세진은 벌떡 일어섰다.
"문대가 네가 제일 열심히 사는 애 같다고 해서..."
문대가 누군데? 배세진의 옆에 있던 노랑이가 대답했다. 내가 문대야.
"노랑이 아니야?"
"노랑이는 선아현이 지은 거고. 나는 문대."
이쯤 되니 집주인 아들인 선아현이 언제부터 저 강아지를 데려다 키웠는지 궁금해진다. 제가 이 집에 입주해서 계약서 문제로 아랫집인 집주인 집에 찾아갔을 때도 저 강아지는 선아현의 품에서 안락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네가 열심히 사는 애가 아니었으면 관심 안 가졌을 거야."
그래서 뭐, 고맙게 여기라는 뜻인가? 이세진이 더러운 표정을 드러내자 어쩐지 결연해 보이는 배세진의 눈이 이세진을 마주해왔다.
"...너는 우리 행성에는 없는 인간형이야. 유전적으로 건강해 보이고 최대 신장도 크고 머리도 비상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싫은 사람에게도 살갑게 대하고 쓸데없는 말에도 열심히 대답해주고..."
배세진의 입에서 낯부끄러운 칭찬이 줄줄 이어졌다. 이세진은 말을 끊고 그건 그냥 우리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터득한 거지 타고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배세진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의료기구 같은 걸 꺼내어 준비하는 문대가 신경 쓰여 차마 말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모르겠지만 최근 732일 동안 문대가 있었는데 아무 반응 없는 걸 보면 우리 행성인들에게 취약한 바이러스 항체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항체? 이세진은 몇 달 전 집주인 아들이 발견된 적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원 신세도 지고 뉴스까지 났던 걸 떠올렸다. 마음이 불안해진 이세진이 그게 뭐냐고 물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발등이 따끔함이 느껴졌다. 발을 내려다보자 아까와 똑같은 전기충격기가 보였다. 손을 따라 올라가 보니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린 배세진이 보였다.
"진짜 미안해 이세진. 우리가 급해서..."
다급히 일어나려던 이세진이 그대로 푹신한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정말 미안하다 중얼거리는 배세진의 목소리가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