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is is love letter.
해당 글은 22.08.07까지 공개됩니다
류청우는 뭐랄까, 참 이름 같았다. 그를 부를 때 떨리는 성대의 울림마저 그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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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우를 알게 된 건 밤은 짧고 낮은 긴 어느 여름날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애매한 시기에 청우는 내가 다니던 학교로 전학을 왔다. 깔끔하게 자른 머리와 서글서글한 눈매, 잘 웃는 모습을 보고 느낀 건, ‘성격 참 좋아 보이네.’였다.
그다음은, ‘나와는 친해지기 어렵겠네.’였고.
청우는 첫인상처럼 친절했다. 그러면서도 선을 지킬 줄 알았다. 또래 남자애들처럼 장난을 치는 모습에서도 진중함이 묻어났다. 모두 그를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데도.
초입을 넘어 아스팔트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기가 느껴지는 여름이 찾아왔을 때까지도 나와 그는 제대로 말 한 번 섞어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멀리서 그를 지켜보았다.
체육 시간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뛰어다녔던 청우는 수업이 끝나면 얼려왔던 이온음료를 마셨다. 그 모습마저도 단정한 그답다고 생각했다. 차가움을 갈구하는 주변 친구들에게 장난을 치다 결국 내어주는 부분에서도 그랬다.
그렇게 평소처럼 흘긋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 내게 다가온 건 단단한 패트병이었다.
“…아!”
헉, 하는 주변 소리가 들려왔다. 둔통으로 인해 머리가 아찔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미안, 미안.”
이마를 제대로 강타하는 패트병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어느새 다가온 청우는 붉어진 내 이마를 손을 문지르며 연신 사과했다.
!?
순간 시원한 향이 풍겼다. 미처 단추를 채우지 못한 교복이 펄럭이며 얼굴에 닿았다.
헙.
자연스레 숨이 멈췄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청우는 '아, 땀 냄새 나려나?' 하면서 자신의 몸을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면서도 후끈한 손바닥을 이마에서 떼지는 않았다.
청우의 오해와는 다르게 이미 한 번 등목을 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에게서는 청량한 향이 풍겼다. 체향 같기도, 섬유 유연제 향 같기도 한 향기에 오히려 정신이 아찔해졌다.
“…괜찮아.”
“보건실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청우는 이마에서 손을 떼고 이제는 양손으로 내 머리를 살며시 잡고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 눈살을 이따금 찌푸리는 게 아무래도 부딪힌 흔적이 남아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뭘 이런 거로.”
“안 되겠다. 약 바르러 가자. 혹 나겠다.”
청우는 어물쩍거리고 있는 내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묵직한 힘에 어어, 하는 사이 몸은 엉겁결에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류청우! 어디가?”
“보건실!”
붙잡은 손이 신경 쓰여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고일까 봐 괜히 걱정됐다. 그렇다고 해서 잡은 손을 함부로 뺄 수도 없었다.
사실 빼고 싶지도 않았다….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 알갱이처럼 그에게 이끌려 보건실에 도착했다. 청우는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안에는 보건 선생님이 계셨다.
“이번에는 어디 다쳐서 왔니?”
“아, 제가 아니고 세진이요.”
이름을 알고 있을 줄 몰랐는데…. 마음이 들뜨면서도 동시에 싱숭생숭했다. 청우는 보건 선생님과도 안면이 있는지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자초지종을 다 설명한 청우는 나를 보건 선생님의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그제야 맞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계속 붙어있던 온기가 사라지자, 그 사이를 찬기가 메웠다. 그게 싫어 손을 꽉 쥐고, 약을 준비하는 선생님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소리가 들리자, 몸이 습관적으로 굳어졌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자, 눈동자를 살짝 돌리면서 연신 목 뒤를 주무르는 청우가 있었다.
“크흠.”
허공을 헤매던 맑고 투명한 눈과 마주했다. 햇빛에 비치는 눈망울이 유독 반짝였다. 분명 새까만 동공인데 어떻게 저렇게 빛이 날 수 있을까. 멍하니 그의 시원한 눈가만을 바라보았다.
반짝거려.
“미안.”
? 갑작스럽게 청우가 내게 다시 한번 사과했다. 입력 오류가 생긴 기계처럼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아차, 싶었다.
“…아냐, 괜-.”
“이쪽 보자.”
뭐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선생님은 의자를 돌려 이마에 약을 발랐다. 화끈한 기운이 약을 바른 곳에서부터 느껴졌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부어오른 부위를 문질렀다. 생각보다 더한 고통에 입을 다물었다. 아까 청우가 만졌을 때보다 더 아픈 것 같았다. 한참을 손바닥으로 찜질을 당하고 나서야 괴로운 손길에서 멀어질 수가 있었다.
“…아파.”
눈물이 고여왔다. 가만히 두는 게 더 나았을 텐데 괜히 보건실에 오게 한 장본인이 조금 원망스러워졌다. 눈으로 흘겨보자, 내가 고통받고 있던 모습을 꽤 즐겼는지 청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하하, 미안. 미안.”
왜인지 저 미안 소리에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울컥하는 기분에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다물었다. 답답함에 한숨이 나왔다.
“얼음찜질하자.”
보건 선생님이 약이 흡수된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올려주었다.
“얼음 녹으면, 다시 가져와라.”
얼떨떨하게 잡은 이마의 얼음주머니를 손으로 고정하며 보건실을 나섰다. 조용히 문을 닫고, 천천히 교실을 향했다. 그 사이에도 청우는 내 옆에 있었다. 이렇게 나란히 복도를 걷고 있으니 친한 사이가 같아 괜히 뻘쭘해졌다. 수업은 이미 시작해 복도에는 나와 청우뿐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에 도착했다. 이미 선생님께서 오셔서 수업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문 여는 소리가 크지 않기를 바라며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다른 손이 먼저 다가와 내 손을 막았다.
“잠시만.”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청우는 조심스럽게 얼음주머니를 내 이마에서 살짝 뗐다. 그리고 환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흉 안 지면 좋겠다.”
그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자꾸만 숨이 닿았다.
“…….”
“너 잘생겨서 흉터 있으면 아깝단 말이야.”
“…….”
“아니다, 예쁜 건가?”
그렇게 말하며 류청우는 싱긋 웃었다. 잘생겼다. 예쁘다. 처음 들어보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할 정도로 많이 들어본 말이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말을 듣는 건 면역이 없었다. 귀가 달아올랐다.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어리벙벙한 사이 청우가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그 말에 이끌려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 이후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업을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것만으로 힘에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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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계기가 되어 청우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언뜻 보면 교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우리 둘은 의외로 통하는 게 많았다. 그중 하나는 영화였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좋아할 것 같은 류청우는 의외로 로맨스 영화를 좋아했다. 화끈한 영화도 좋아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좋다며 종종 울적할 때마다 본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너는 어떨 때 울적할까?
또, 나와 함께 영화를 보는 순간에 너는 어땠을까?
나는 네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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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우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의외의 조합이지만, 어울리는 친구가 되었다. 밥 같이 먹고, 가끔 축구도 하고, 게임도 하는, 누군가가 '걔네 친하잖아.', 할 법한 그런 사이.
그게 좋았다.
그리고 서글펐다.
해소되지 않은 갈망만 남은 채 우리는 3학년이 되었다. 3학년에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반이었다. 운이 좋았다. 함께할 시간이 1년이 늘어나게 된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전처럼 지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청우는 청우 나름대로 입시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나는 나대로 입시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그 짧은 순간이 소중했다.
청우는 교대로 가는 게 확실해 보였고, 나로서는 그와 같은 대학을 진학하기가 어려웠으니까. 정해진 기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래서 별거 아닌 순간들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특별함 없는 하루는 짧았고, 일주일은 금방이었으며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입시가 끝났다. 입시가 끝나고 나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를 만끽했다.
청우가 고백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기 전까지.
“세진아, 류청우 고백받았다며 들은 거 있냐? 걘가? 전에 좋아하는 애 있다던데.”
“…아니. 없는데.”
“와, 역시 류청우. 남고인데도 여기까지 와서 고백받다니.”
“…….”
“넌 있냐? 너도 잘생겼잖아.”
청우가 고백받았다는 소식에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지.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하얘졌다. 입시가 끝난 후에 느꼈던 묘한 거리감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왜 문득 함께 봤던 영화 속 대사가 떠오를까. 친구로라도 남고 싶었는데. 내가 축하해줄 수 있을까? 서 있는 땅이 곧 무너질 것 같아 책상을 손으로 붙잡았다. 바르르 떨려오는 입술을 꾹 다물어, 떨림을 숨겼다. 지금 교실에 청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오~ 류청우~ 고백받았다며.”
내 간절한 소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돌아온 건지 소란스럽던 교실은 더 시끌벅적해졌다. 이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
하늘이 빙글 돌았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교실 밖으로 나섰다. 숨이 자꾸만 차올랐다. 후욱, 훅 호흡이 짧아졌다.
“…흐윽.”
고백.
고백.
고…, 백.
꿈결에라도 감히 내뱉기도 힘든 그 단어가 자꾸만 맴돌았다. 손으로 아무리 눈을 비벼도 눈물이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인정하고 나면 분명 걷잡을 수 없을 테니까. 차오르는 눈물과 울먹이는 소리를 꾹꾹 눌러 담았다. 꾸역꾸역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화장실을 찾았다. 특별실이 모여 있는 층이라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한참 얼굴을 씻었다. 거울에 창백한 낯빛의 남자가 보였다. 찬물에 씻어서 그런지 더 하얘 보였다. 그 꼴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용기도 없으면서. 청승은.
“하아. 세진아, 찾았잖아.”
!
겨우 균형을 이루던 적막이 깨졌다. 다시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보기 싫은데. 정말 보고 싶지 않은데. 그에게 시선을 보내는 건 나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어디 아파?”
…왜. 날 걱정해.
“조퇴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다정해….
“…괜찮아.”
물기 젖은 검은 눈망울을 피해 겨우 대답했다. 초점 너머로 검은 물체가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무엇도 닿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청우의 손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더 다가오지는 않았다. 어색하게 부유하던 손을 거두고, 청우는 말을 이었다.
“…고백받은 건-.”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해?”
넘실대던 감정이 또다시 넘쳐흘렀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런 와중에도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듣기 싫었다.
그게 무슨 말이든 듣고 싶지 않았다.
“…미안, 몸이 안 좋아서.”
굳은 류청우를 둔 채 곧바로 교무실을 향했다. 수능 이후 풀어진 학생들 때문에 조퇴를 시켜주지 않았던 담임이었는데, 내 상태가 확실히 좋아 보이지 않았는지 별말 없이 조퇴를 할 수 있었다.
교실에서 가방을 챙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쳤다.
그 뒤로 청우와는 냉전이었다. 청우에게 고백했던 그 아이와 청우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어 미뤄두었던 감정이 폭포처럼 내렸다. 나는 거대한 물줄기 아래서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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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나면 함께 해보자는 했던 것 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홀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류청우가 나와 같은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나중이었다.
[그거 암? 청우도 같은 학교.]
[왜?]
[몰라. 걍 들음.]
[궁금하면 연락ㄱㄱ]
충격에 손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다시는 안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연락할 용기가 없었다.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몇 배는 넘는 사람이 다니는 대학교에서 류청우와 우연히 마주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연한 사실을 나도 모르게 아쉬워한다는 걸 깨닫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쳤다는 생각만 여념이었다. 다시 만나면 어쩌려고. 다른 무게의 감정에, 이해받지 못할 행동만 반복할 게 뻔했다.
청우 생각에 빠지면 괜히 우울해졌다. 오늘은 오늘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개강총회가 있는 날이었으니까. 동기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분명 그랬는데.
왜 나는 청우에게 업혀있는 걸까.
처음 가진 술자리였다. 주량도 뭣도 모르는 상태였다. 조용히 있다가 가면 되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다. 흥 많은 사람 사이에서 술 게임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시작은 좋았다. 강요 없이 적당히 즐겨 가며 질 때마다 한 잔, 두 잔씩 마셨다. 문제는 다들 정신을 놓을 무렵이었다. 눈이 풀려가면서부터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든 웃겼고, 뭐든 신이 났으며, 뭐든 즐거웠다. 허공을 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무아지경으로 즐기며, 평소보다 더한 에너지를 쓰고 나니 그 뒤로는 방전이었다.
“세진아, 깼어?”
뒤에서 자꾸만 꼼지락거리니 업고 있는 이가 금방 눈치챘다. 모르는 척하기에는 뻔뻔함이 다소 부족했다.
“…아니.”
“하하, 너 엄청 잘 놀더라.”
청우에게 업혀있는 것만 아니라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내려줘.”
“저기까지만 가서.”
청우가 가리키는 곳은 편의점이었다. 네온사인이 비추는 환한 얼굴이 보였다. 전과 다름없는 얼굴을 보니 심장이 아릴 듯이 쿵쾅거렸다. 혹여나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큰 울림이었다.
청우는 편의점에 도착하자 의자에 나를 내려주었다. 이렇게 얼굴을 직접 보니 되게 뻘쭘한 마음에 곧은 시선을 피했다. 청우는 내 모습을 보고 피식 한 번 웃더니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이 새벽에 청우가 내게 온 걸까. 가장 먼저 핸드폰을 살폈다. 마지막 통화 기록이 청우였다.
34초.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한영이가 연락하더라. 배세 술통에 머리 박았다고.”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에 박았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다가온 청우가 내게 숙취해소제를 건넸다.
“그래서 진짜 술에 코 박고 죽을까 전화했지.”
정말 이곳이 이불 속이라면 구멍이 뚫릴 정도로 올려 차기를 날리고 싶었다. 부끄러움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언제 연락하면 좋을지 기다리기도 했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지금 청우와 있는 게 술에 취해 미쳐 헛것을 보는 건 아니겠지? 청우는 내가 손에 쥐고만 있던 숙취해소제를 직접 뜯어내 입술에 대었다.
“마셔.”
얼떨떨한 상태로 그가 넘겨주는 숙취해소제를 마셨다. 이런 부분까지도 과하게 세심했다. 다 마신 병의 뚜껑을 닫고 나서 청우는 다시 말을 걸었다.
“세진아.”
“…….”
“내가 좋아?”
뭐?
머리에 찬물이 끼얹었다. 몽롱하게 남아 있던 술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언제 알아차린 거지? 아니, 모르는 게 이상했을까? 서 있는 청우의 모습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그 위에 주먹을 쥐고 손을 올렸다. 모양새가 마치 벌을 받기 직전 어린아이와 비슷했다.
턱, 하고 커다란 손이 머리 위로 얹어졌다.
“고생시킨 거 생각하면 더 괴롭히고 싶은데.”
따뜻한 손길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정말 매일매일 영화만 본 것 같은데. 또 이런 걸 보고 있는 건 별로라.”
청우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서 그런데,”
“음, 나랑 사귈래?”
울컥했다.
“세진아, 울어?”
청우가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고개 숙인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울어.”
손으로 흐르는 눈물 닦아주었다. 자꾸만 물이 새어 나왔다. 멈추려고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배세진의 울먹거림이 점차 커졌다.
“응? 나는 너한테 사귀자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역치를 넘은 다정함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이렇게 다정하지나 말지. 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이건 전부 다 네 탓이었다. 다 네 죄였다. 네가 너무 다정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좋아해.”
널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어.
마주 안아서야, 그때서야, 나만큼이나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좋아해, 청우야.”
더는 놓을 수가 없었다. '나도, 세진아.'하며 꽉 끌어안아 주는 너를 놓고 싶지 않았다.
끝끝내 숨길 수 없었던 사랑의 선고일이었다.
- 발신 전화, 34초
“어? 받았다.”
[…….]
“어디야? 데리러 갈까?”
[…청우야, 다정하지 마.]
“…….”
[자꾸, 흐읍. 오해하게 되잖아.]
“오해하라고 하는 건데.”
[…….]
“세진아, 그래서 거기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