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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온통 검고 하얬다.

 

 

막 통화를 끝낸 박문대의 시선이 방의 끄트머리로 향했다. 낡은 매트리스에 걸터앉은 배세진은 바깥에 쌓인 눈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혹여 추운 걸까 싶어 컨벡터의 온도를 높이자 더운 바람이 일었다. 건조하고, 숨 쉬기 조금 답답한 수준까지 데워진 뒤에도 배세진의 낯이 영 나아지질 않았다. 일 났네, 진짜. 한숨을 푹 내쉰 박문대가 일인용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나무로 된 다리가 끼익 울었다.

 

“내일 오전에는 비행기 뜰 수 있을 것 같대요.”

 

불편하진 않죠? 어르는 말투에도 배세진은 요지부동이었다. 미동 없이 창문 너머를 향한 시선이 불안하게 떨렸다. 한참이 흐른 뒤에야 배세진은 입을 열었다.

 

“…… 내일도 비행기가 안 뜨면,“

 

민폐겠지? 말하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무슨,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눌러 참은 박문대는 새삼 그의 성질을 떠올렸다. 좋게 말해 세심하고 터놓자면 예민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구 반대편에 갇힌 상황에서 자기가 폐를 끼칠 걱정을 하는 게 말이 돼? 공연히 기분이 상한 박문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듯싶었다.

 

한참동안 배세진만을 보던 박문대가 그의 시선 끝으로 눈을 돌렸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건만 꽤 쌓인 눈 덕분에 어둡다는 느낌은 없었다. 떨어지는 눈송이를 좇던 박문대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얼결에 붙잡혀 따라 일어난 배세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낡은 가구에서 끽, 불쾌한 소음이 났다.

 

“저희 나가죠.“

 

옷장 문을 열며 뱉는 말씨가 여상하다. 박문대는 그의 말이 배세진에게 가닿기도 전에 패딩을 꺼내 꿰어 입었다. 남은 하나를 건네자, 얼떨떨한 시선이 뺨과 손끝에 차례로 닿는다. 파리했던 낯에 당황이 서렸다.

 

“어, 어디를?”

“어디든요.“

 

그리 말한 박문대가 배세진의 어깨에 패딩을 둘러 입혔다.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하고서도 순순히 손을 집어넣는 모양새가 귀여워 잠깐 웃음이 났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박문대가 하얀 털모자며 장갑까지 꼼꼼히 챙겨준 뒤에야 다시금 배세진의 손목을 쥐었다. 남은 정수리 끝까지 꽁꽁 싸맨 주제에 자기는 패딩 한 벌이 다였다.

 

 

밖은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눈 내리는 날은 기온이 오른다는데, 영 틀린 말은 아닌 듯 했다. 쌓인 눈 덕에 시야는 어둡지 않았으나 대신 발이 푹 박혀 움직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부츠 가지고 오길 잘했네요.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박문대가 말했다. 내리는 눈이 머리에, 어깨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걷자니 공원 하나가 나왔다. 작고 소담한 공원은 눈에 파묻혀 있었는데, 중앙의 분수대만은 깨끗했다. 자세히 보니 분수대를 채운 물이 내리는 눈을 녹여 먹고 있었다.

급하게 찾은 숙소 주변에 뭐가 있는지 살필 정신까진 없던 배세진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박문대를, 눈 덮인 공원을 번갈아 보았다. 평이한 낯을 보니 그는 당초부터 이곳에 올 생각인 듯 했다. 미리 말해주면 뭐 덧나나. 속엣 말을 삼킨 배세진이 새하얀 공원을 다시금 훑어보았다. 야밤에 눈까지 쌓인 공원은 버려진 공터 느낌이 났다.

부유하던 시선은 분수대에 멎었다. 말간 물에 툭 툭 떨어져 스러지는 결정이 신기한지, 배세진은 한참동안 수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를 본 박문대가 분수대와 가까운 의자로 배세진을 끌었다. 얌전히 뒤를 따르는 게 꼭 어미를 따르는 새끼 오리 같았다.

 

의자 위에도 눈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가볍게 혀를 찬 박문대가 대강 눈을 털자 그럭저럭 앉을 자리가 났다. 먼저 자리를 잡은 박문대가 끝이 발개진 손으로 제 옆을 두드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는 것도, 부끄러워하는 것도 배세진 혼자였다. 의자에 앉으면서도 힐끔 박문대의 손을 살피던 배세진이 장갑을 벗어 건넸다. 작은 손과 장갑을 번갈아 보던 박문대가 그 둘을 한 번에 쥐었다. 맞닿은 손이 차갑고, 뜨거웠다.

 

겹쳐진 두 개의 손이 배세진의 패딩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볼록해진 주머니 틈으로 하얀 장갑이 삐져나왔다. 주머니가 작은 탓에 둘의 손이 틈 없이 붙었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눈을 마주한 박문대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러면 둘 다 따뜻하잖아요.”

 

그에 배세진의 뺨이 속절없이 달았다. 추위에, 감정에 물든 코와 뺨 위로 박문대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검고 하얗기만 한 이 공간에서, 배세진만이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 유일한 색채가 박문대를 이끌었다.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입맞춤은 길지도, 격정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내려앉듯 맞닿았을 뿐이다.

 

배세진은 순간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이전에, 그 눈에 들어온 풍경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좁은 주머니 안에 맞물린 체온, 뺨 언저리를 훑는 더운 숨결과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 고요히 내려앉은 뜨거운 입술의 감촉은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깨달음과 함께 배세진의 시간이 제 속도를 찾을 즈음, 그 모든 것이 느리게 물러났다. 아, 숨소리에 아쉬움이 섞였다.

 

“…… 들어갈까요.”

 

그리 말하는 박문대는 이미 일어나 있는 채였다. 엇갈린 높이 탓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배세진은 아쉽고, 참 다행이라는 양가적 감정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박문대는 그 답지 않게 이미 훌쩍 앞선 채였다.

탓에 배세진은 숙소에 돌아올 때까지 박문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 언뜻 비치는 발간 것이 그도 춥거나, 혹은 나와 같은 마음이구나 추측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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