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is is love letter.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w.초초
(*)오메가버스 세계관 기반, 테스타가 데뷔 4년차인 시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제목은 이정하 시인의 시 「낮은 곳으로」에서 인용했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기 위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심장이 도무지 진정되지를 않았다. 딱히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몇 번을 뒤척이다 한숨을 내쉬고는 물이라도 한 잔 마시려고 몸을 일으켰다.
달칵, 본인이 연 문 소리에 스스로도 움찔할 만큼 숙소는 고요했다.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고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이다. 발소리를 죽이려고 애를 쓰며,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가고자 했던 부엌과 전혀 다른 방향에 있는 한 방 문 앞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홀린 듯 걸어가 그 문 앞에 섰다. 그와 동시에 불현듯, 이 숙소의 모든 사람이 깨어있다는 직감이 머리를 강타했다.
먹먹한 귓가 사이로 심장 소리만이 울려 퍼지며, 머릿속은 이내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가장 먼저 이 문을 여는 건 그여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문 고리에 손을 올렸다.
* * *
"후,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잠깐 쉬면서 각자 아쉬운 부분 체크하시고, 정시부터 한번 더 맞춰보죠!"
돌아오는 멤버들의 대답을 적당히 받아 넘기며, 이세진은 머릿속으로 오늘 안에 끝내야 할 진도를 체크했다. 적어도 동선만큼은 끝내야 하고, 디테일 맞춰야 할 부분 확인해두고, 그리고….
'그 형 사람 만들어 놔야지.'
안무는 얼추 다 외운 것 같은데 동선까지 병행하려니 뇌에 과부하가 온 게 틀림없었다. 휘적대며 당황하는 모양새가 팬들이 종종 비유하는 그 소동물 같아 퍽 볼만했던 참이다. 이온 음료로 터지려는 한숨을 막는 데 성공한 이세진이 '그 형'을 힐끔거렸다.
배세진은 방금 실수했던 선아현과의 페어 동작을 다시 맞춰보는 중이었다. 그래도 지난 3년간 기울인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서너 번 만에 타이밍을 맞추는 데 성공하더라. 이제 보기 좋게 각을 세워 다듬는 것은 이세진의 몫이었다. 상대가 워낙 잘 추는 친구라 신경을 좀 써야 할 듯 싶다. 이세진이 머릿속 체크리스트에 해당 사항을 추가하는데 박수를 치던 선아현이 흠칫 놀라며 제 앞의 사람에게 속삭였다.
"저, 형…, 지, 지금 좀…."
그 뒷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배세진이 얼굴을 붉히며 미안, 짧게 사과를 덧붙이는 모습을 보니 알 만 했다.
'페로몬이라도 흘렸나 보지.'
그리고 그건 요즘 이세진이 가장 짜증스러워하는 주제였다.
배세진은 얼마 전 오메가로 발현했다. 그의 나이가 올해 스물 여섯이니, 대부분의 특이형질자가 청소년기에 발현한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상당히 늦은 셈이지만 의외로 드물지 않단다. 다만 늦게 발현할 수록 향의 강도나 외부 저항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열성오메가로 판정되었다.
하루아침에 이성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생태계에 처박힌 배세진은 경악했다. 당시 룸메이트였던 박문대의 말에 따르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인터넷에서 온갖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사건사고를 검색해 탐독했다고 한다.
그 결과, 배세진은 그 누구보다, 적어도 이세진이 아는 그 누구보다 페로몬 컨트롤을 가장 빠르게 습득한 사람이 되었다. 테스타는 절반이 알파인 그룹이니 그 일원으로서 박수를 보내야 할 성과였지만….
'내 앞에서만 너무 잘 하는 거 열 받는다고….'
비단 섹슈얼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감정 과잉인 상태에서는 저절로 향이 배어나오기 마련이다. 방금도 몇 번이고 틀렸던 안무를 성공했다는 기쁨에 저도 모르게 향을 흘린 게 분명했다.
배세진은 친한 멤버 앞에서 방심하는 빈도가 높았고, 심지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경계하는 차유진 앞에서조차 한번쯤은 방심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유독 그의 앞에서만, 이세진의 앞에서만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건 정말 큰 문제였다.
이세진은 배세진과 연애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 *
깨달은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정신차리고 보니 이미 잠겨있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처음에는 접자고 생각했으나… 외부 사람과 사귀다 파파라치에게 걸리느니 매일 얼굴 보는 멤버와 사귀는 게 낫지 않을까? 끝내주는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그냥 접겠다는 생각을 접어버렸다. 요즘은 알파와 베타인 채로 자각했으면 꽤 마음 고생 했을 텐데 지금 자각해서 다행이라고까지 생각 중이다.
아무튼, 사랑을 깨달은 이세진은 배세진을 관찰하면서 점수를 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고백은 도전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승산 없이 덤벼들고 싶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여기서 나가고~ 여섯, 발끝 신경 쓰시고!"
그런 의미에서 단체연습 후 가지는 나머지 교실은 꽤 기꺼운 시간이었다. 컴백 준비를 하려면 반드시 둘이 붙어있어야 하는 시간. 여기에 약간 사심을 담아 고민도 좀 들어주고, 할 수 있다면 도와서 호감을 쌓아볼 속셈이었다.
원래도 어색한 사이였던데다 배세진이 오메가가 된 후로 다소 위축되어 원하는 만큼 아웃풋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가끔 분위기가 좋을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헉, 안, 허억, 안 틀렸지!"
몇 시간의 노력 끝에 이제 막 동선에 맞춰 틀리지 않고 안무를 성공시킨 참이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배세진이 주먹을 불끈 쥐고 성취감에 취해있었다.
사실 지금의 성공은 앞으로 가야할 먼 길의 고작 첫 걸음이지만, 이세진은 그런 눈치없는 생각은 얼른 밀어두고 칭찬의 말을 골라냈다.
"후, 확실히 점점 습득 속도가 빨라지시네요."
"…! 큼, 아, 아니야. 이제 한 번 성공했을뿐이고…."
그동안 겪어온 바 더럽게 까다로운 배세진은 입 발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미를 길게 늘이는 말투도 싫어하는 것 같다. 그 때문에 이세진은 팩트로 담백하게 칭찬하는 전략을 가져가고 있었다. 다행히 먹혀들었는지 배세진이 아닌 척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렸을 때도 성공하면서 배세진의 기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숙소로 가는 콜택시를 기다리며 어깨를 꼼질대는 모습에 이세진의 심장도 간질거렸다.
가열찬 연습에 다리가 후들대는 상황에서도 기어코 향을 내비치지 않는 게 살짝 열받는 건 어쩔 수 없었으나, 기분이 좋아 입이 트인 그와 제법 괜찮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기에 그럭저럭 상충시킬 만했다.
"그래서 유진이가 기상천외한 곳에 간식을 숨겨뒀는데 그게 얼마나 웃기던지- 아, 형님 전화 온 거 아니에요?"
"! 미, 미안. 잠깐만."
허겁지겁 꺼내진 핸드폰에서는 전화가 아니라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알람을 밀어서 끈 배세진은 어째서인지 살짝 이세진의 눈치를 보며, 약… 먹을 시간 맞춰 둔 거야, 하더니 가방에서 물병과 약통을 꺼냈다. 오메가용 억제제다.
배세진은 본인의 향을 풀지 않는 데에 도가 텄지만 열성인만큼 외부에서 간섭하는 페로몬에는 저항력이 떨어진다. 억제제를 먹으면 외부의 향 그 자체를 지울 수는 없어도 찍어누르려는 알파의 의도에 저항할 수는 있다. 본능보다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점을 의식했는지 그는 강박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루 세 번 시간맞춰 억제제를 삼키고 있었다. 매일 스케쥴에 맞춰 하루 전 날 알람시간을 따로 설정해두는 정성까지 보이면서.
"형님은 정말, 음, 관리를 철저히 하시네요?"
그렇게 불안한가? 그게 고민이라면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을 해주면 좋겠는데.
"…제대로 해야지, 팀에 민폐끼치지 않으려면. …나 때문에 다들, 좀 불편한 점이 있을테니까. 숙소도 그렇고…."
"아."
팀에 가는 영향이 포인트였군. 기억해두자.
배세진이 오메가가 되고 테스타는 당연히 숙소를 둘로 나누었다. 지금은 베타인 박문대와 김래빈이 배세진과 같은 건물 다른 층에서 함께 산다. 집이 두 채가 되어 방도 1인 1실로 바뀌었다.
"그걸 신경쓰고 계셨어요? 각자 독방에서 쾌적하게 지내는데 좋죠, 뭐~ 이사도 업체에서 해줬고, 박문대는 회사 창고에 넣어놨던 선물들 집으로 가져왔다고 좋아하던데요."
"그, 그렇긴 한데. 그래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너는, 음…, 독방 싫어하잖아?"
"그거야 덥앱하기 불편하겠다 싶어서 그랬던 거고, 지금은 다 독방인데 굳이 사양할 필요도 없어졌죠~"
"…그래?"
배세진은 썩 납득한 눈치는 아니었으나 일단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세진이 제법 그도 신경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이세진은 냉큼 그럼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더 신경쓸거야. …실력도 더 늘릴 거고."
너도 그게 좋지? 배세진이 작게 덧붙였다.
이세진은 의식적으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내 의견을 묻는다고? 어쩐지 예전에 싸웠던 그 날이 생각나는데.
'이거 혹시… 내가 제대로 안 한다고 지X할까봐 미리 신경쓴다는 말은 아니겠지?'
싸한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지만,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이세진은 그냥 '잘 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근데 지금도 형님 열심히 하는 거 알겠으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배세진은 그런 이세진을 관찰하다가 대충 고개를 주억이고는 약을 먹었다.
* * *
컴백이 다가올수록 배세진의, 뭐랄까, 자기계발 욕구가 부쩍 상승한 것 같다. 이전의 더 잘할 거라는 다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혼자 안무를 보강하거나 홍보용 인터뷰에서 말 한 마디 더 하는 일이 늘었다.
하지만 춤이라는 게 한번에 느는 것도 아니고, 그는 생각은 깊어도 즉각적인 처세술은 떨어졌기 때문에 사전 준비로 대비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세진이 체감하는 성장의 정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배세진도 그 사실을 아는지 그닥 뿌듯한 눈치는 아니었다.
이전의 대화로 불안의 원인을 알게 되었으니 도와줄 참이었다. 배세진의 실력이 늘어 미래의 연습실 데이트가 줄어들 것이 아쉽기 짝이 없었지만, 일단 점수를 따야 데이트든 뭐든 할 것이 아닌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사서 스트레스를 받는 꼴을 보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기도 했고. 그리고 배세진이 이상하게 이세진을 신경 쓰는 것 같으니, 협력으로 호감을 어필하면서 싸한 구석도 없애볼 요량이었다. 연애를 위해서는 관계 개선이 필수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이세진이 판단하기로, 배세진은 지독한 로맨티스트인 것이다.
사랑이 없는 연애는 받아들이지 못할 타입이고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교류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 사람이니 '너에게 관심 있는데 한 번 사귀어보지 않겠느냐', '사귀다 보면 정들지 않겠느냐' 따위의 접근은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분명했다.
이세진은 본인에게 유리하다면 그런 기회조차 이용할 생각이 있었지만…, 뭐, 대상에 맞는 공략을 해야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배세진의 그런 면이 딱히 싫지도 않았다. 이세진이라고 낭만이 없겠는가? 그가 좋아하는 사람도 그를 좋아하는, 충분한 쌍방 애정이 있는 연애를 누가 싫어한다고. 연애가 성사되면 아무 문제 없을 일이다. 아직 못 해서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세진은 그를 주시했다. 음악방송 컴백 무대와 순위발표 무대까지 끝내고 드디어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쩐지 불편한 얼굴로 배세진이 말을 꺼냈다.
"…우리 오늘은 이제 숙소 가는 거지? 그럼 나 잠깐 화장실 좀."
그는 여상하게 말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안색이 무척 좋지 않았다. 무리에서 떨어져 화장실로 향하는 걸음이 어쩐지 비틀대는 것도 같아 이세진은 옆의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곧장 뒤로 따라붙었다.
도착한 화장실에서는, 그다지 뒤늦게 따라온 것도 아닌데 한창 구역질 중인 배세진이 있었다.
"…형! 괜찮아요?"
"괘, 괜찮…! 우웁."
말도 다 못 마치고 다시 헛구역질을 시작하는 게 정말 안 괜찮아 보였다. 이세진은 얼른 다가가 그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아침엔 괜찮아 보였는데…. 혹시 체한 거 아니에요?"
"아, 아니야…. 괜찮았, 는데, 그, …냄새가, 너무."
드문드문 이어지는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서 뒤섞인 사람들의 체향이 속을 뒤집어놨나 보다. 생각해보면 오늘이 그가 발현하고 처음 맞는 음악방송 날이었다. 방송 관계자 중에는 알파와 오메가가 많다. 무대라는 흥분요소에 아이돌도, 심지어 무대 아래의 관객들도 골고루 페로몬을 뿜어댔다. 그러고보니 순위발표 때부터 급격히 표정이 안 좋았던 것도 같다.
"별 거, 아니고…, 토하니까, 낫네.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 가서 옷 갈아입어."
쪼그려앉아서 몸도 못 펴는 주제에 입은 멀쩡하다고 잘도 말했다. 이세진은 어차피 탈의실 순서 밀렸다는 핑계를 대고 그대로 눌러앉아 계속 등을 쓸어주었다. 여기서 예, 하고 가면 천하의 머저리가 따로 없지. 점수를 따보려는 꿍꿍이와는 관계없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는데 발이 떨어질리가 만무했다.
…잠깐, 점수?
이러면 안 되는데 욕심이 불쑥 고개를 처들고 일어났다. 이세진은 배세진이 원하지 않을 것 같아 정도를 택했을 뿐 본래 유리한 방법이 있다면 잡아볼 궁리를 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겠다.
"형, 제가 도와줄까요?"
이와중에도 은근하게 속삭이지 않으려고 노력한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배세진은 구역질로 생리적 눈물이 맺힌 눈을 들어 이세진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니 더 욕심이 생겨 충동적으로 던진 말에 이유를 가져다 포장하기 시작했다. 고민이던 팀에 영향을 주지 않고, 이세진이 배세진을 생각한다는 방향으로 잘 풀어서.
"여러 사람 냄새 섞여서 속 뒤집힌 거니까, 차라리 더 센 페로몬으로 누르면 나을 거거든요. 제가 해줄게요."
형 아프면 다들 걱정할 거고, 있다가 차 타고 이동해야하는데 그 때 또 토할 수도 있잖아요. 알파 향 맡는 게 썩 내키지 않을 거라는 거 아는데, 음, 저도 이러는 적은 처음이지만…, 그래도 형이랑 꽤 친해졌는데 힘들어하는 모습 보는 게 마음 편하지도 않고요.
"진짜 이상한 의미 아니고 딱 속 괜찮아지게 도와만 드릴게요. 어때요?"
그냥 페로몬 묻힌다고만 말하면 미친 놈처럼 보일 테니 구구절절 사족을 덧붙였는데, 배세진은 마지막까지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이세진은 내심 이 수작질이 먹혀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지만.
"…됐어. 너한테 그런 도움 받고 싶지 않아."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배세진의 얼굴을 보고 이세진이 당황했다.
"어, 그래요?"
"어. 그렇게 안 해도 금방 괜찮아져."
"지금 형 안색 보면 그런 말 못할 텐데. 그냥 해요. 저 진짜 형 도와주고 싶어서 말한 거…,"
"됐다고!!"
배세진이 벌떡 일어나 독기 서린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넌, 넌 내가 너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지?! 내가, 네 도움 받아야 겨우, 네 최저선에 맞출 수 있으니까…."
춤이나 말 같은 것도 딸리는데, 오메가가 되어서 위험부담이 늘어나니까 더 번거롭다고 생각하잖아. 지금도, 알파인 네 도움 없이는 안 될거라고 생각하지. 나도, 나도 네가 신경쓰지 않아도 제 몫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서, 나도 미치겠다고…."
그 말을 끝으로 배세진은 비척비척 달려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이세진은 한순간에 뒤집힌 분위기와 쏟아부어진 문장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걸 쫓아갈 생각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아무도 없는 문가만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 * *
그 날 밤 배세진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아까는 심한 말 해서 미안.]
[네가 내 모자란 면을 채워주려고 남들보다 고생하는 거 알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됐는데...]
[너한텐 항상 미안하고, 얼른 내가 더 열심히 잘 해야겠다고 생각해.]
[그런 주제에 생각만큼 안 된다고 도와주겠다는 너한테 되려 화를 냈지.]
[미안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오늘도 고생했어. 푹 쉬어.]
메세지를 읽었으니 답을 보내야할 텐데, 뭐라고 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배세진이 원래 자존심이 센 인간인 것은 알고 있었다. 팀에 대한 애정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도.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오메가가 되었으니 압박감에 반대급부로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장하고 싶어하는 거라고, 그게 마음이 편하다면 도와주자고, 도와주고 싶은데 잘 안 풀린다고만 생각했다. 물론 오늘은 개인적인 욕심을 조금 앞세우고 말았지만, 어쨌든.
메세지로는 좋게 포장했지만, 배세진은 이세진을 도와주는 척 눈치나 주는 성격파탄자로 보고 있었나 보다. 아니면, 백 번 좋게 생각해봐도 팀의 존속을 위해 그를 감시하는 사람 정도로 여겼나 보지. 어느 쪽이든 그의 머릿속에서 이세진은 눈에 안 차는 멤버를 고까워하는, 처음으로 싸웠던 그 예전의 애송이로 고정된 게 분명했다. 차라리 화장실에서 어디서 되도 않는 개수작이냐고 소리를 질렀다면 지금 상황보다는 덜 꼬였을 것이다.
'우리가 썩 잘 맞는 성격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지금은 좋아하는데….'
오랜만에 머리가 덜 도는 느낌에 이세진은 핸드폰을 침대 한 구석으로 치웠다. 그리고 처음 사랑을 깨달은 날을 떠올렸다.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울렁거려 잠에서 깬 밤이었다. 홀린 듯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밤. 왜 그러고 싶은지도 생각하지 못한 채, 남들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문고리에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달칵, 안쪽에서 문이 먼저 열리며 낯선 페로몬이 쏟아져내렸다. 이 숙소에 있을리 없는, 오메가의.
페로몬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문앞의 이세진을 보고 허억,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박문대였다.
"하, 씨, 미친, 너 뭐야? 오밤중에 남의 방 앞에서…."
평소라면 귀신인 줄 알고 겁쟁이 문대 놀랐냐며 3일 정도는 놀릴 계획을 세웠겠지만, 이세진은 그 너머를 살피느라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쏟아져나오는 페로몬의 주인은 박문대가 아니었다. 그의 뒤, 방 한 구석 침대에 웅크려 있는 사람은. 지금 박문대의 룸메이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마저 떠올리기도 전에 숙소 사방에서 여러 개의 문이 연달아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세진은 즉각 박문대를 문가로 끌어내고 도로 방문을 당겨 닫았다. 거의 본능에 맡긴 동작이었다.
갑작스런 힘자랑에 박문대는 할 말이 많은 듯 했지만, 이세진의 뒤로 접근하는 다른 사람을 발견하고 이내 시선을 옮겨갔다.
"청우 형. 지금 세진이 형 열이 좀 나서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형?"
어디 불편하세요? 얼굴은 왜 가리고…. 말끝을 흐린 박문대는 뒤따라 나온 선아현과 차유진도 똑같이 행동하는 걸 보고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듯 했다. 그 전엔 몰랐겠지. 그는 베타였으니까.
이후로 선아현과 류청우가 일단 숙소 밖으로 나가자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코를 있는대로 막은 차유진이 외투를 주워들고 밖으로 뛰쳐나갈 때까지 이세진은 망부석처럼 방 앞에 서있기만 했다. 머리로는 얼른 나가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에 방 앞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전의 충동은 다른 알파가 오기 전에 본인이 먼저 들어가고 싶은 것이었고, 지금의 불안은 본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알파가 방에 접근할까 위기감을 느낀 것이었지만. 당시의 이세진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오도가도 못한 채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결국 그는 박문대에게 등을 떠밀려 마지막으로 집에서 쫓겨났다.
류청우의 차 한구석에 몸을 처박고서야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가늠하려 억지로 머리를 쥐어짤 수 있었다. 왜 그 곳에 들어가고 싶었는지, 왜 그 앞을 떠나기 싫었는지. 아직도, 코 끝에 남은 그 향을 다시 맡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이세진은 알파다. 그것도 키가 크고, 잘 생겼고, 성격까지 서글하니 좋은 알파였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는 항상 인기가 많았고 원한다면 관계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거기에 머리까지 좋았다. 아이돌을 목표로 하면서, 그는 나름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눈을 길렀고 장래에 리스크가 될 관계는 일찌감치 골라내거나 선을 지키며 대했다. 그럴 수 있는 처세술도 갖추고 있었으니까.
즉, 이세진은 사회생활을 굉장히 잘 했고, 사람 보는 눈도 제법 있었으며, 워낙 잘난 탓에 상황을 제게 유리하게 조정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벽을 뚫고 나타나 기어코 눌러앉은 사람이 배세진이다.
이세진과 이름이 같던 시절의 배세진은 협조성이 없고, 예민하고, 외부 자극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아웃사이더였다. 실력조차 없어서 도무지 아이돌에 적합하지 못했고 그건 본인 또한 절감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데뷔조에 오르는 바람에 하기도 싫은 단체생활을 하느라 죽을 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여겼다. 이세진은 내심 불만에 차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끊어냈을 인간상인데 5년이나 가시거리에 두고 감시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가 빨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더라. 정확히는, 맞았는데 사람이 바뀌어서 틀린 명제가 되더라.
그것도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 사람을 빠르게 판단하고 분류하던 이세진에게, 그건 정말 낯선 경험이었다.
그게 신기해서 계속 눈길이 갔을까? 아니.이세진에게 굳이 신기한 사람을 꼽자면 그건 그와 생각이 다 들어맞는 박문대나, 착하다는 말로는 묘사가 부족한 선아현 쪽이 맞았다. 배세진은, 이세진에게, 굳이 콕 집어 설명하자면…. 그래, 당황스럽고 곤란한 사람이었다.
이세진의 편견을 깬 것이 당황이라면, 곤란은 배세진의 성격에서 나온다. 그는 적당히 돌려말하지도 않는 주제에 이세진이 좋게 넘어가려고 하면 바로 얼굴이 굳어버린다. 그래도 방송국에서 보면 나름 사회생활은 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가까운 사람에게는 진심을 내보이는 것이 옳다는 고지식한 사고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그게 부정적인 진심일지라도 내보이는 대쪽 같은 성격인 것이다.
그의 실력이 모자라 자주 부딪혀야 하는데 사사건건 이런 반응이니, 이세진도 짜증이 나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날 것의 반응으로 응수할 때도 있었다. 하지 않은 건지 할 수 없었던 건지를 굳이 고르자면 반반이지만, 아무튼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 쉬이 접하지 못했던 타입이라 이세진은 스스로의 이런 모습이 낯설다. 그래서 곤란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배세진이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 바운더리 안의 사람을 끔찍히 생각하는 사람이지. 그렇게 털을 세우면서도 어느새 바운더리 안에 이세진까지 야무지게 욱여넣은 사람. 그걸 이세진이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는 내면의 발전을 이룬 사람.
배세진은 본인이 좋게 변한 걸로도 모자라 이세진의 생각까지 좋게 바꿔버린 걸까? 지금까지 이세진은 누가 배세진이 '좋은가, 싫은가' 묻는다면 전자라고 대답하겠지만, '좋은가, 좋지 않은가' 묻는다면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숙소에서 이세진이 느낀 감정은 그게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굳이 따지자면….
배세진이 상처받는 게 싫다. 그가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해있다면 가장 먼저 반응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기 전에 안아주고 싶었다.
밤부터 뛰던 심장이 쿵쿵 울려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다. 주변의 소리는 마치 물 속에서 듣는 것처럼 아득하다. 정강이까지밖에 오지 않는 물길을 거슬려하며 걷고 있었는데, 정신차리니 그 얕은 물에 드러누워 푹 잠겨버린 자신을 발견한 기분이다.
몸을 일으키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얕은 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세진은 새벽녘의 해가 뜰 때까지 가만히 그 감각만을 곱씹으며 밤을 지새우다가…,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어느새 당황스럽고 곤란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이 좋게 변할 수 있다는 걸 형이 몸소 증명해놓고…. 왜 내가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 못 하는데…."
심장이 뛰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전히 그 새벽의 물 속인 것처럼.
* * *
그 날 이세진은 끝내 답장으로 쓸 말을 찾지 못했고, 당연하게도 둘의 사이는 서먹하기 짝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무시한 건 아니다. 짧고 굵게 스케줄이 몰아치는 동안 정신이 없어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뿐이다.
어색하게 눈을 피하는 그의 앞에서 배세진이 어찌나 침통한 표정을 짓던지…. 안타까워 말이라도 걸어볼까 싶다가도, 소리지르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혀 끝에서 말이 도로 들어갔다. 저 싫다는 말을 듣고 아무 일 없던 척 예전으로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주제에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한 스스로가 정말 등신 같았다. 뭐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이세진은 답답한 마음에 뒷머리를 헤집으려다가,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손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짧은 컴백활동이 끝나고 테스타는 휴가를 받았다. 이 사이 생각을 좀 정리하고, 관계 개선을 위한 행동지침을 다시 세워볼 요량이었다. 그리고 이세진은 더욱 완벽한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하루 일찍 본가를 떠나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너 지금 숙소 간다고?]
박문대의 메신저다. 이번 휴가에 선아현 집에 잡혀갔는데, 뭐지? 혼자 있고 싶은데….
[ㅇㅇ 왜? 설마 일찍 와서 세진이랑 놀아주려고~?? (눈을 빛내는 이모티콘)]
[ㄴ]
[야 너 우리 숙소 냉장고에 있는 된장찌개 좀 가져가서 먹어]
[내가 휴가 때 먹으려고 넉넉하게 했는데 아현이네 와서]
[상하면 아까운데 잘 됐네 수고]
[헉 문대문대... 내가 잔반처리반이야? 실망했어 (엉엉 우는 이모티콘)] 1
당연히 답장이 오지 않았지만 이세진은 실실 웃으며 다른 숙소가 위치한 층의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뭐, 일찍 오지도 않고 저녁 알아서 챙겨주는데 땡큐지. 단톡방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휴가를 즐기는 것 같고…. 조용하게 보낼 수 있겠다.
그런 속편한 생각이나 하며 숙소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그 어느 날 느껴본 공기가 삽시간에 그를 덮쳤다. 그 때와는 다른 공간에, 시간도 그 때와 달리 한낮인데도… 형언할 수 없는 선명한 기시감이 그의 뒷목을 쭈뼛거리게 했다. 발은 착실하게 움직여 또다시 부엌이 아닌 어떤 방문으로 그를 데려다놓았다. 그럴리가 없는데, 지금은 휴가기간인데….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 안에 배세진이 있다.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문을 열고 싶은 충동이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그 때보다 강한 것 같기도 하다. 본능에 몸을 맡기고 뛰쳐들어가 그를 안고 싶은 충동과 여기서 잘못 건드렸다간 두말할 여지도 없이 그의 바운더리에서 영원히 추방당하리라는 예감이 각축을 벌였다.
참자. 눈을 질끈 감으며 이성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이었다. 방 안에서 작게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자, 앞선 다짐에도 불구하고 이세진은 문을 벌컥 열고 말았다.
'히트 사이클….'
과거의 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농도의 달짝지근한 향이 새어 나왔다. 얼른 이 곳을 벗어나자고 이성이 경종을 울렸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아이돌을 위해 바쳐 온 이세진이 히트를 맞은 오메가의 페로몬에 면역이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큰일 내지 않으려면 지금 나가야했다.
하지만 미련하게도 방구석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웅크리고 있는 배세진을 보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혹시 기절한 건 아니겠지? 히트가 처음이라 모르고 약을 안 먹었을지도 몰라. 그럼 괴로울텐데…. 깨워서 약 먹었는지만 물어보자.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이세진은 배세진 앞까지 걸어가 몸을 숙였다.
"형. 형, 일어나 봐요. 자는 거예요? 형."
코를 막고 한손으로 흔들어 깨우자 배세진이 가물가물한 눈을 드러냈다. 눈앞에 왜 그가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일단 그걸 궁금해할만큼의 정신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 약은 먹었고요?"
"…아, 큼, 아침부터…."
아침에 열이 올라 히트를 직감하고는 어머니께서 걱정하실까 숙소로 들어왔단다. 히트인데 혼자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이를 빠득 갈고 말았지만, 어차피 지금 눈앞의 사람을 제외한 자극엔 오감이 파업 중이라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약 먹었으면 됐어요. 냉장고에 먹을 거 있다니까 챙겨 먹어요. 열이… 많이 나니까, 박문대나 래빈이한테 좀 일찍 와서 봐달라고 할게요."
말을 하려고 숨을 쉬면 페로몬이 더 잘 느껴져서, 이세진은 턱에 힘을 꽉 주고 얼른 할 말을 내뱉은 뒤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어물쩍거리면 향후 10년 정도는 배세진 마음 속 최고의 쓰레기로 꼽힐 법한 일을 벌일 것 같았다. 의식적으로 발끝의 신경을 채찍질할 때였다.
"이, 이세진…. …도와줄래?"
"…?"
지금 뭐라고?
"내일, 애들 오는데… 그, 전까지는, 끝내야 하잖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이세진은 반쯤 돌리다 만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멍청하게 고개만 겨우 돌릴 수 있었다. 화자는 틀림없는 배세진이다.
"모레부터 스케줄도 있는데, 팀에 민폐끼치기 싫어. …네가 도와줄 수 있다며."
설마하니 이 사람, 타인 냄새 한 번 덮어주는 거랑 히트 사이클 도와주는 게 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하지만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세진은 본인에게 유리한 기회를 허투루 보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일은 우선 머리 한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이세진은 배세진의 옆에 누워 그를 이불째로 꽉 끌어안았다. 마침내 마음껏 맡아보는 배세진의 향은 달고 달았다. 제 페로몬을 풀어 두 향이 뒤엉키는 것까지 실감하니 아직 아무 것도 안 했는데도 충족감이 머리 끝까지 쭉 치고 올라왔다.
껴안은 팔로 상대도 기분 좋게 목을 울리는 것이 느껴져 그는 저도 모르게 품 안의 이마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정말이지 완벽한 순간이었다.
동그란 정수리에 코를 묻은 채 등을 살살 쓸어내리며, 이세진은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가능한 선이 어디까지일지를 가늠해보았다. 저쪽에서 도와달라고는 했지만 제대로 된 사고로 튀어나온 말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의 윤리적 경계선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최대로 이쪽을 어필할 수 있는 선을 잘 골라내야 했다.
하지만 길게 궁리할 필요가 없었다. 품 안의 배세진이 갑자기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너, 너랑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예?"
"이성대로 움직일 수 없는 건 정말 최악이야…."
그러니까 지금…, 히트 사이클로 몸을 못 가누는 오메가가 된 것도 서러운 와중에 하필 상대가 이세진이라 더 싫다는 건가. 화가 나야 할 텐데, 충족감이 컸던 만큼 돌아오는 감정은 실망이었다.
"형, 제가… 그렇게 싫어요?"
지는 싸움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이렇게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끝까지 할 생각도 없었으니 걱정말라고 달랠 수도 있었지만, 이 순간 이세진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질문을 받은 배세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 하고 숨만 몰아쉬더니, 갑자기 왈칵 더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며 이세진은 머리가 서늘하게 식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냥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나가자고 마음 먹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배세진이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 너, 너를 좋아해…."
…뭐라고? 오늘 몇 번이나 귀를 의심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 네가 좋아서,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 말을 끝으로 배세진은 베개에 고개를 처박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이세진이 얼굴을 다시 돌리려 했으나, 그는 이불을 더듬어 뒤집어 쓰며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이세진도 이불을 붙잡고 멍청하게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뭐, 뭐, 무슨 소리예요? 제대로 설명해봐요!"
"흑, 헉, 너, 너를 좋아한다고!"
"좀 더 길게!"
"너, 끅, 너랑 이렇게 막, 충동적으로, 그냥 알파랑, 오메가니까, 하는 식으로 껴안고 싶지 않았다고!! 내 몸도 이상, 한데, 날 좋아하지도 않는 너한테, 안아달라고 해야하는 게, 싫다고…!"
배세진은 히트로 머리가 반쯤 멈춘 와중 한 번 말이 터져나오니 주체가 되지 않는지 그대로 이 세상에서 제일 볼썽사나운 고백을 줄줄 뱉어내기 시작했다.
"너, 너한테 고백하고 싶어서, 춤이나, 그런… 도움받는 것들을, 네 눈에 찰만큼 잘 하게 되면, 내가 부, 부족해서 네가, 날, 번거로워하잖아. 혼자 잘 하게 되면… 그렇게 잘 보여서 고백하려고 했는데…! 조금씩 좋, 아 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 갑자기 오메가가 됐다고 하니까, 네가, 날, 더, 예의주시하는 것 같고, 몸은 안 따라주고, 내가 실수한 후로는, 너는 아예 나한테 질린 것 같고…!"
"그, 진정 좀…,"
"네, 네가 그 때부터 화난 것 같아서 그냥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래도 싫은 걸 어쩌라고!!"
꼭, 꼭 페로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 같아서 비참하다고! 그 말을 끝으로 폭주기관차 배세진은 베개에 도로 고개를 처박은 채 꺽꺽대며 울었다.
이세진은 관성적으로 잡아끌던 이불을 계속 당기며 지금 들은 말을 속으로 정리해보았다. 지금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거지? 배세진이 좋아한다고 했지?
그럼 그 앞에서 향을 절대 흘리지 않는 것이나, 얼른 그의 최저선을 맞출만큼 제 몫을 해서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철저한 자기관리가 모두… 그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노력한 거였다, 이거지.
"…하하!"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세진은 살갑게 도와주고 점수를 따서 고백하려고 했는데 배세진은 반대로 도움이 필요없는 대등한 관계가 되어서 점수를 따고 고백하고 싶었단다. 기저에 깔린 감정은 동일할진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어긋날 수가 있는 건지.
"형, 일어나 봐요. 할말 있어요."
인생에 두 번은 못볼 눈물의 고백을 받았으니 제대로 답을 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이세진은 배세진의 어깨를 살살 흔들며 일어나라 종용하기 시작했다. 쉽게 몸을 일으키지 않아 제법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지만, 뭐, 그동안 해온 삽질의 기간을 고려하면 이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끈질기게 그에게 말을 건네며, 이세진은 배세진에게 어떤 말로 고백하면 좋을지를 고민했다.
사실 저도 좋아해서 계속 쳐다봤어요? 점수 따고 싶어서 열심히 도와줬다는 얘기를 해도 괜찮겠다. 지금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으니 오메가가 되기 전부터 좋아한 것 같다는 말도 좋겠지. 사랑 없는 관계는 싫다는 로맨티스트를 만족시키려면, 이세진도 줄곧 그를 좋아했으며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페로몬에 굴복한 본능이 아니라 그저 연인의 애정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꼭 들어가야할 것 같다.
하지만 절절한 멘트들을 떠올려 낸 보람도 없이, 이세진은 마침내 고개를 든 배세진에게 아무 말 없이 키스하고 말았다. 둘이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났으니, 지금 잠깐 마음 가는대로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런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이세진은 생각을 멈추고 맞댄 입술과 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시 귓가가 먹먹해진다. 그러나 이제 들리는 심장소리는 두 사람의 몫이다.